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를 사로잡는 이 시대의 엄청난 문제들에 직면하여 무기력하게 서 있습니다. 매일의 업무 요구 사항을 충족시키기도 힘든 상황에서 어떻게 추가적인 기도 시간을 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의 직면한 “불가능”한 것을 효율적으로 대처해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고별 대화를 나누실 때 미래에 그들과 함께 하는 교제가 어떤 모습일지 사랑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는 나의 친구이니라” (요한복음 15:15) 우리와 이렇게 친밀한 관계를 맺으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을 부탁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고 확신시켜 주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하지만 왜 이 약속은 종종 우리의 경험과 모순되는 것일까요?
우리의 인간관계를 살펴보면, 우리가 서로의 삶을 솔직함과 사랑으로 더 많이 공유할수록 말이나 지시가 없더라도 옳은 일을 행하기가 더 쉬워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님과 맺는 평생의 관계에 더욱 더 적용됩니다. 예수님은 이 관계를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비유를 통해 명확학 설명해 주셨습니다. (요 15:5) 가지는 스스로 “생산”하지 못합니다. 가지는 단순히 포도나무에 끊임없이 연결됨으로 인해 생명을 유지합니다. 성령께서는 이러한 이상적인 공동체 환경을 가능케 하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의 계명을 우리 마음에 기록하여 우리가 아버지의 소원을 받아들여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중보해야 할 지 알 수 있도록 하십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예수님은 고별 설교에서 성령님의 중요성에 대해 상세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주 성령님을 오순절 사건과 은혜의 선물을 받는 것 이상의 것과 연관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위대하심을 이해하기에는 그것만으로는 너무 부족합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머무시며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영혼의 깊은 곳까지 이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우리를 근본부터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고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는 만큼 성령께서는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가지”로서의 자연스런 연결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그럴때 우리는 다른 시각으로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그분께 순종하는 법을 배웁니다. 우리의 자의적인 생각, 판단, 행동은 점차 성령의 통제를 받게 됩니다. 이로서 자연스럽게 끊임없는 기도가 생겨납니다. 우리에게 기도 드리고 응답 받을 수 있는 영적 권위는 우리가 기도하려고 애쓰는 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더불어 방해받지 않는 관계를 맺고 있는데에서 비롯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박해가 기다리고 있다고 선포하신 후에 성령님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언급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 8~11절에서 예수님은 상담자와 위로자로서의 성령님의 사역을 세 가지 방법으로 설명하십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성령의 첫 번째 사역은 우리에게 죄가 있음을 증명하시는 일로서, 곧 “사람들이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증명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보통 “죄의 목록”을 기대했을 수 있기에 처음에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성령님의 주된 임무는 우리 삶의 진실을 밝혀주는 것이지만 그분은 우리를 상대로 죄의 여부를 결정하며 처벌을 부과하는 소송을 일으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고발자가 아니라 위로자요 권고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갈보리에서 드려진 속죄의 희생이 얼마나 큰 일인지 알게 하시며 더욱 더 위대하도록 드러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죄의 문제는 단번에 영원히 해결되었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통해 모든 죄가 완전히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죄는 오직 하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며, 이것은 “당신의 희생은 나에게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자비의 제안을 계속해서 거부하는 사람은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고, 받아들이는 자는 죄의 사슬에서 풀려날 것입니다.
성령의 두 번째 사역은 우리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님은 “나는 –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볼 수 없는 – 아버지께로 간다” 라는 이 의로움이 이루어진 것에 확신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대제사장으로서 그들을 대신하여 아버지 앞에서 간구하실 것이고 그들은 그들 눈 앞에 주님이 계시지 않아도 주님의 아버지 곁에 계시는 이 의로우심으로 살 것입니다. 그 당시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잃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이 ‘의로움’에 대해 너무나 눈이 어두워 있었기에 예수께서는 그들이 그분을 사랑한다면 그분이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함께 기뻐할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동안 우리 그리스도인은 ‘보지 않고’ 사는 데에 익숙해져서 이러한 ‘존재의 상실’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서 우리는 초기 교회의 특징이었던 기다림, 기대를 앓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 이런 상황이 바뀔 것입니다. 교회 가운데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딤후 4:8 참조) 성도들이 함께 모일 것입니다.
처음부터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을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 오늘날 온갖 불의가 만연한 종말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으며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점점 더 어려움을 겪습니다. 수많은 부정적인 사실들 앞에서 “보지 않고” 믿음 안에 굳건히 머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간청하는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우리에게 걱정스러운 질문으로 마무리하셨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 그가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눅 18:8)
성령의 세 번째 사역은 우리에게 심판에 대해 일깨워 주시는 것으로서 즉 “이 세상의 임금이 이제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확신하는 한 우리의 기도는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외치신 예수님의 승리의 소리, “다 이루었다!” 는 영원히 유효하며 그것으로 사탄의 운명은 결정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지구상에서 목격하고 있는 것은 참패를 당한 원수의 마지막 반란입니다. 패배한 나라라 할지라도 공식적으로 패배를 인정하고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원수를 “이 세상의 임금”이라고 부르십니다. 사탄은 이 권력 주장을 펼치며 예수님과 마주하여 세상의 모든 왕국을 보여 주며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리라”(마 4:9)고 말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전략을 계속할 것입니다. 사탄을 무시하고 과소평가하는 사람은 그의 손아귀에 자신을 넘겨주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령께서는 우리의 시선을 진정한 권력을 지니신 분, 즉 우리에게 “이 세상의 임금이 심판을 받았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내게 주어졌다”고 말씀하신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신 분께로 끊임없이 인도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에 따라 죄의 결과인 심판이 보류되거나 허용됩니다. 모든 권한은 오직 우리의 높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시작된 종말의 때에 기도하는 사람들인 우리는 환상에 빠져서는 안되며, 오히려 예수님께서 우리 시대에 관해 말씀하신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그리스도인 박해, 전쟁, 재난, 타락, 부정적인 발전, 다양한 질병과 고통을 단순히 ‘기도’로 없애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도는 영향을 미치고 완화시키며 방향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원에 이르면 많은 기도가 응답된 것을 인식하고 감사드리게 될 것입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마태복음 13장)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이 최대한 함께 성숙하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분의 주된 관심은 밀입니다. 밀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대 추수 때까지 한 알이라도 잃어버리지 않고 보호, 보존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에 있는 큰 절정, 이 ‘마지막 수확’을 위해 기도와 온 삶의 헌신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초창기때부터 바실레아 어머니 (1904 – 2001)의 기도와 노래는 우리에게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요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 (Johann Christoph Blumhardt, 1805-1880)에게서 일찍이 채택한 한 문장은 어떤 상황에서라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우리 단체에서 드리는 공동기도는 ‘아멘’으로만 확고하게 한 것이 아니라 늘 새롭게 ‘예수님은 승리자 이십니다’라고 선포함으로써 확증하였습니다.
지옥은 이런 선포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지상의 모든 믿는 자들과 함께 성령 안에서 하나됨으로 이 선포에 동참할 수 있는 참으로 좋은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승리자 이십니다! 이 세상의 임금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땅의 왕들을 다스리시는 승리자요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곧 그의 통치를 시작하실 것이며 모든 사람이 큰 권능과 영광 가운데 계신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주님의 것입니다. 아멘.”

요엘라 크뤼거 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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